최고의 로맨티스트 사라 본(Sarah Vaughan)
영화 [접속]에서 엔딩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어 유명해진 'A Lover's Concerto'.
이 눈부실 정도로 찬란했던 노래는 바로 재즈 보컬리스트 사라 본이 불렀다. 2분 40여초의 짧은 팝스타일의 곡이었지만 이 곡이 전해준 감동은 음악이 줄 수 있는 '환희' 그 자체였다. 'A Lover's Concerto'라는 노래가 그랬던 것처럼 사라 본은 한 마디로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다. 'My Funny Valentine'도 'Misty'도 'Over The Rainbow'라는 곡을 들어도, 일반적인 스탠더드를 불렀음에도 사라 본의 버전은 왠지 모르게 너무나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남자가수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굵고 허스키한 음색과 바이브레이션을 들려주는가 하면 때로는 비단결처럼 고운 목소리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정말이지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량을 보여준 사라 본은 딱히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재즈보컬의 참 맛을 일깨워준 경이로운 싱어였다.
https://youtu.be/x8cFdZyWOOs?list=PL786019D92CA17A74
일반 대중들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노래보다 악기 연주의 비중이 높은 재즈는 어려운 음악에 속한다. 반대로 악기를 다루는 뮤지션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음악이 재즈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악사들은 보컬리스트에 비해서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하지만 재즈에서는 길던 짧던 어떤 식으로든 즉흥연주가 존재하고 이 즉흥연주를 통해서 뮤지션들은 자신을 표현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 트롬본이나 베이스와 같이 그 자체로는 주목받지 못했던 파트가 무대의 중앙에서 솔로를 펼치는 장면이야말로 재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악사들의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재즈의 세계에서 재즈 보컬은 자신의 목소리 역시 하나의 악기라고 생각하게 됐다. 재즈가수는 멜로디와 가사를 노래하기도 하지만 다른 악기 연주자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음성만으로 즉흥연주를 펼쳐 보이기도 한다. 물론 재즈보컬의 기준이 애들립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우리는 여러 가지 기준을 정하고 재즈보컬을 구별하게 되지만 악기적인 유연성 못지않게 풍부한 성량, 감정표현 같은 부분이 동시에 중요하며 누차 언급하지만 자칫 이성적인 면이 감성적인 면보다 과도하게 앞서는 음악은 그 자체로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 재즈가 연주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준 장르이긴 하지만 재즈에서도 보컬의 영역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보컬의 존재감은 재즈와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혀주었고 동시에 풍부한 감성의 세계로 안내해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재즈에서 대표적인 여성 보컬리스트로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을 꼽는데, 이 세 사람을 흔히 재즈의 3대 디바라고 부른다. 이 세 명의 여성 싱어들은 각각의 굳건한 음악성과 개성으로 그 우열을 논하기 어렵다. 빌리의 팬이나 엘라, 사라의 팬들은 이미 그녀들의 노래가 저마다의 다른 세계에 우뚝 서 있음을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세 사람을 비교해 보자면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선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그저 즐겁게만 들을 수 있을까?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빌리의 노래가 위안이 되기란 쉽지 않다. 더불어 빌리의 노래는 그 특유의 슬픈 곡조로 인해 듣는이로 하여금 적지 않은 부담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반면에 엘라 피츠제럴드는 풍부한 테크닉과 다양한 감성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강점을 지녔다. 때문에 엘라의 노래에서는 언제든 원하는 분위기를 얻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완전한 몰입이 쉽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사라 본의 노래를 들으면서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온몸을 통해 몰입시키는 호소력 넘치는 노래야 말로 단연 최고라고 할 만큼 그녀의 노래는 상당한 중독성을 갖게 한다.
사라 본의 음악적인 탁월함을 말하기에 앞서 잠깐 그녀의 바이오그래피 중 일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만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가 아마추어 재즈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1942년 이후의 상황을 보자. 당시 사라의 재능을 눈여겨본 재즈싱어 빌리 엑스타인(Billy Eckstine)은 자신이 보컬로 속해있던 '얼 하인즈(Earl Hines) 빅밴드에 사라를 추천했고, 이듬해 4월 그녀는 얼 하인즈 악단의 세컨드 피아니스트 겸 보컬이 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빌리 엑스타인은 얼 하인즈 밴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악단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른바 '빌리 엑스타인 빅밴드' 가 그것이었다. 당시 엑스타인 악단의 구성원은 찰리 파커(Charlie Parker),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아트 블래키(Art Blakey) 등으로 이들 모두는 재즈의 새로운 시류 '비밥'의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이었다. 엑스타인은 여기에 사라 본까지 영입하게 되는데, 결국 사라 본 역시 모던재즈의 영향권 속에 필연적으로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라 본은 모던재즈의 거장들과 가장 많이 협연한 보컬리스트로 기록되고 있다. 그녀의 위대함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사라 본을 그저 노래 잘하는 여자 가수로만 치부할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 의미는 이렇다. 사실 모던재즈(1940년대의 비밥)의 혁명은 많은 보컬리스트들에게 부담으로 존재했던게 사실이었다. 과거의 가수들, 그러니까 스윙밴드의 단조로운 반주 위에서만 노래했던 가수들과 다르게 사라 본의 뛰어난 테크닉은 도전적인 비밥 연주자들의 반주를 배경으로 한층 더 빛을 발휘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천부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식견, 악기연주를 장악하는 풍성한 감정의 표현은 사라 본이라는 가수에게 모던재즈 뮤지션으로서의 면모를 부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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